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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화선 둘, 몽타주(생략)에서 그림(여백)으로


임권택은 생소하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에서 자라온 사람으로서 그의 영화 취화선은 낯설게 보인다. 마치 종로(현대 문명의) 바닥을 돌아다니다가 광화문을 스쳐 지나갈때처럼 프로이트적으로 말하자면 Uncanny (기이한, 낯설은) 광경이다. 취화선에서 보여지는 계급과 그들의 예법, 생활양식에 있어 영화라는 서구적 프레임 안에 있는 것과 서구적 패턴에 익숙한 나의 관점도 한 몫 할 것이다. 여기서의 낯설음과 또 다른 낯설음이 취화선에는 존재하는데 그것은 영화에서 구사하는 영화적 문법의 몽타주이다. 이는 사건의 개연성과는 동떨어져 여느 영화와 달리 하나의 사건으로 집중되는 갈등, 고조의 인과관계와는 달리 신들이 분산되어 있고 개별의 에피소드로 가장해 낯설게 보여진다. 분명, 낯설은 지점에는 익숙하지 않은 서사구조와 보여지지 않는 것에 대한 생략이 존재한다. 흥미롭게도 이것은 장승업이 그리는 동양화의 미덕인 여백이라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영화에서 보여지는 장승업의 그림 양상을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초반에 장승업이 오늘날의 비평가들인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둘려싸여 그리는 그림은 매우 화려하고 획이 많지만 시간이 경과할수록 외적, 내적갈등을 겪으며 획이 적어지고 여백이 많아짐을 볼 수있다. 이에 영화 문법에서의 생략과 그림 문법에서의 여백은 동일하게 해석 되어진다. 임권택의 시선은 장승업이자 임권택의 영화는 장승업의 그림으로 개별의 신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영화가 되듯 장승업의 그림도 각각 고유의 산물이지만 그의 내면의 갈등과 시간의 흐름으로써 병풍으로 완성된다. 임권택은 장승업으로 투영되어 영화라는 병풍의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