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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1. 음성 존재10)

최초의 숨바꼭질

인간의 시각은 영화처럼 부분적이고 한 방향을 향해 있지만, 청각은 사방을 향해 열려 있다. 우리는 뒤에 있는 것은 보지 못하지만 사방의 소리를 듣는다. 아마도 귀가 가장 먼저 발달하는 감각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태아 단계에서부터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태어나서도 그 목소리를 식별한다. 반면에 시각은 출생 이후에야 기능을 하기 시작하지만 형태와 개념, 특히 명명에 관하여서는 촉각이나 후각, 심지어는 청각도 견주지 못할 만큼 독보적으로 막대한 목록을 보유함으로써 적어도 서구 문화권에서는 가장 조직화된 감각이 되었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시각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는데, 형태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알아보는 것이 평가를 내리는 그 어떤 일보다 훨씬 정확하고 섬세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청각은 오래된 만큼 매우 예민한 감각이지만 대부분의 기능에 이름도 붙여지지 못하고 모호한 채로 있어서 느끼기는 하지만 뭐라고 말할 수는 없다(놀랍기는 하지만 20세기가 되어서야, 그리고 피에르 셰페르의 작업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인 보편성 속에서 소리의 지각들에 대한 명명을 시도하게 되었다!11)).
인간은 젖먹이 아이 시절 엄마와의 숨바꼭질놀이ㅡ엄마가 아이 뒤로 숨거나, 무언가로 얼굴을 가리거나, 또는 아이를 돌려 놓아 엄마 얼굴을 못 보게 하는ㅡ를 경험한다. 그러나 아이는 계속해서 엄마의 냄새를 맡고 목소리를 들으며, 때로는 피부 접촉을 통하여 보이지 않아도 엄마가 곁에 있음을 느낀다(보인다는 것은 최소한의 거리와 분리를 전제로 한다). 아이에게는 극적인 이 나타남과 사라짐의 반복을, 영화에서는 외화면을 비롯한 몇몇 장치들을 통하여(한 인물을 숨기지만 소리를 통해 그의 존재를 계속 느끼게 한다) 일종의 치환과 환원으로 연출한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의 데쿠파주와 편집은 어머니의 나타남과 사라짐의 반복과, 그리고 '자아가 버려진 상태와 상징의 시작을 통제할 수 있게 하는 반복적인 놀이들'의 모범으로서 프로이트가 발견하고 라캉이 분석한 '작은 실패(있다! 없다!)' 놀이와 관련 있다.12)
따라서 내화면과 외화면은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즉 프레임에서 벗어난 등장 인물이 목소리에 의해 계속 유지될 때, 어떤 등장 인물의 목소리는 들려주면서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지 않을 때, 그것을 숨바꼭질놀이라고 부를 수 있다.

안에도 밖에도 없는

그래도 우리는 발성 영화의 발명으로 배우들의 목소리를 듣고, 가르보의 영상에 하나의 목소리를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거의 언급하지 않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뒤에 있다고 가정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려주면서도 발성 영화 역시 닫힌 문이나 불투명한 커튼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혹은 빈 공간을 보여주고, 프레임 밖이지만 '거기,' 무대에 '현재' 있다고 가정된 누군가의 목소리를 울리게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퓔스(《쾌락》)과 웰스(《위대한 앰버슨가》) · 뒤라스(《대서양의 남자》) 영화의 음성 존재의 현존과 같이 텅 비어 있는 이미지, 심지어는 어두운 스크린을 사로잡는 것이다.
한 오래된 사전은 아쿠스마티크(Acousmatique)를 '음원은 보지 못한 채 듣는 소리를 일컬음'이라고 설명한다. 예전에는 드물게 사용되었지만 현대에는 라디오 · 텔레비전 · 음반에 의해 체계화되어 매우 흔하게 된 청취 상황, 즉 당연히 앞의 매체들보다 앞섰고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특정한 용어가 없어 그 자체로서 규정되지 못하고, 더욱이 그 효과들은 고려되지도 못했던 청취 상황을 지칭하는 이 용어를 1950년대에 되살린 피에르 셰페르는 마땅히 칭송받을 만하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상황, 곧 음원을 보며 말하는 것에 만족하는 '직접' 청취라는 언뜻 보아 평범한 상황을 위해, 특정한 용어 하나를 찾는 일이 자신의 목적(구체 음악과 관련된)에 유용할 거라고 판단하지 못했다. 이 '직접' 청취라는 표현은 불분명하기 때문에 필자는 시각화된 청취13)라고 하겠다. 발성 영화는 자연스럽게 이 시각화된 소리(종종 '동시적인' 또는 '화면 안의' 라고 불리는 소리)에서 시작되었지만, 곧 아쿠스마티크한 소리를 실험하게 된다. 우리는 종종 1930년에 제작된 《M》을 언급하는데, 거기서는 현상금 포스터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아동 살해범의 화면 밖 목소리가 어린 소녀(이때는 소녀 역시 잘 알려진 촬영 사진과는 달리 화면 밖에 있다)에게 "멋진 풍선의 대가를 받게 될 게다"라고 말한다. 이 쇼트에서 목소리와 그림자를 함께 등장시키고, 아쿠스마티크한 목소리를 이용하여 불안하게 만드는 일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오래잖아 목소리는 그림자나 이중 인화를 필요로 하지 않고, 아쿠스마티크한 목소리의 등장 인물을 강요하게 된다.
하나의 장면(시각화된)과 또 다른 하나의 장면(아쿠스마티크한) 사이에서 변하는 것은 소리나 그 성질 · 현존 · 거리 · 색깔이 아니다. 오직 우리가 보는 것과 듣는 것의 관계만 변한다. M의 목소리는 그가 보이는 다른 쇼트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을 때에도 명확히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영상 없이 어떤 영화의 '음 테이프'를 들을 때, 우리는 시각화된 소리와 아쿠스마티크한 소리를 단지 소리만으로 구분하기는 불가능하다. 음 테이프는 보았던 영화의 이미지나 영상에 대한 기억을 단절시키는 게 가능하다. 영상 없는 청취는 모든 소리를 일률적으로 '음성 존재화'한다. 본래 그 소리들이 영상과 맺었던 관계의 민감한 흔적을 음성 존재화된 '음 테이프' (따라서 이번에는 진정한 하나의 음 테이프, 즉 하나의 전체가 된다) 속에 간직하지 않고서 말이다.
이러한 차이의 초점을 이해하기 위해 아쿠스마티크라는 단어의 옛 의미로 돌아가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이 단어는 말하는 사람을 봄으로써 전달 내용을 곡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제자들에게 휘장 뒤에서 말하는 스승의 목소리를 듣게 했던 피타고라스학파에 부여된 이름이었던 듯하다(마찬가지로 텔레비전에서는 말하는 사람이 눈살을 찌푸리거나 손동작을 하는 것ㅡ카메라가 자세히 보여주기 좋아하는ㅡ을 보여주면서 시청자의 주의를 흐트러뜨리기 쉽다). 그런데 스승 또는 신 · 성령을 일종의 아쿠스마티크한 목소리로 만드는 이 금지된-보기의 규칙은 수많은 의식과 종교, 특히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피분석자와 심리분석자가 서로 보지 못하는 프로이트의 치료 요법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문이나 커튼 뒤 또는 화면 밖에 숨겨져 있는 아쿠스마티크한 스승의 목소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여러 주요 영화들, 예를 들면 《마부제 박사의 유언》(악령의 목소리) · 《사이코》(어머니의 목소리) · 《위대한 앰버슨가》(감독의 목소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아쿠스마티크한 현존이 어떤 목소리의 현존이라면, 특히 그 목소리가 시각회되지 않았다면ㅡ아직 그 목소리에 하나의 얼굴을 부여할 수 없다면 그것은 독특한 종류, 일종의 말하고 행동하는 그림자의 실체이다. 필자는 이것을 아쿠스마티크한 실체라는 의미에서 음성 존재(Acousmêtre)라고 부르겠다. 당신과 전화로 얘기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일종의 음성 존재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당신이 보았던 사람이 화면 밖으로 나가서 보이지 않는데 목소리가 계속 들린다면ㅡ그 사람 또한 음성 존재일까? 그는 아마 다른 종류의, 이미 시각화된 음성 존재일 것이다. 볼 수 없는 목소리에 얼굴을 부여하느냐 부여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적어도 두 가지 경우를 구별하기 위해 새로운 용어들을 사용하는 일이 물론 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음성 존재의 정의를 열어 놓아서, 상당히 융통성 있는 하위 구분을 피하려고 한다. 이 용어의 개념을 보편적이고 모호하게 남겨두겠다. 차라리 완전한 음성 존재라고 불리는 것, 즉 아직 보여지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화면 안에 등장할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 문제가 되겠다. 좀더 익숙하고 안심이 되는 것은 일시적으로 화면 밖으로 나가지만 가시적인 화면을 덮는 음성 존재의 어두운 영역 속에서 보여진 적이 있는 음성 존재인데, 이는 존재에 완전한 음성 존재의 능력 중에 몇 가지가 전파될 수 있다. 음성 존재인 친절한 해설자 또한 익숙한 것으로, 그는 결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며, 그렇게 할 위험도 없다. 어떠한 능력과 위험들이 문제가 되는지 더 뒤에 가서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라디오의 음성 존재와 연극이나 오페라의 무대 뒤에서 나는 목소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것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동일한 종류이고, 스피커와 무대 뒤에 보이지 않는 배우를 필자가 거창하게 재발명하는 것은 아닌가?
라디오의 음성 존재. 라디오는 본질적으로 아쿠스마티크하다는 자명한 이치에 대해 필자를 용서해 주길 바란다. 라디오에서 말하는 음성 존재들은 매체 자체의 원리에 의해 그러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볼 염려가 없고, 바로 이 점에서 그것들은 영화의 음성 존재들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라디오에서는 '보여주다'와 '부분적으로 보여주다' '안 보여주다' 사이에서 끌어낼 수 있는 효과가 없다.
반면 영화에서 음성 존재의 구역은 변동하고 사람들이 보게 될 것에 따라서 언제나 재검토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규정된다. 아무도 없는 영상에 얼굴이나 몸이 보이지 않는 음성 존재들이 음 테이프르 가득 채우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캘커타 사막에서의 베니스라는 이름》과 같이 극단적인 경우에도(《인디언 송》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영화에서는 원칙적으로 그 얼굴과 몸들이 언제나 등장할 수 있고 목소리들은 탈음성 존재화(désacousmatiser)될 수 있다. 게다가 라디오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언제나 열려 있는 속임수의 가능성과 함께 보지 못한 것에 대해 미리 판달할 수 있게 한다. 프레임의 가장자리가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서 화면이 잘리고, 어디에서 외화면이 시작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라디오는 아주 달라서 어디에서 화면이 잘리는지 우리는 모른다.
연극의 음성 존재. 조르주 사둘은 《영화의 역사》에서 발성 영화 초기 '시청각의 대위법'에 관한 연구들을 '연극 무대 뒤의 일상적인 소음들'과 비슷하게 생각하려고 한다.14) 무대 뒤의 목소리와 영화의 음성 존재의 목소리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 이상의 것이 있는데도 말이다.
연극에서 무대 뒤의 목소리는 무대 외의 다른 장소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분명하게 들리고, 실제로도 다른 곳에 위치한다. 영화는 하나의 무대를 가장하기는 해도 하나의 무대가 아니라 다양한 관점의 프레임을 사용하고, 그 프레임 속에서 시각화된 목소리와 음성 존재의 목소리들은 관객이 보는 그대로 그들의 머릿속에서 나누어진다. 대부분의 경우(스테레오 음향은 아직 예외이고, 그것이 사용되는 방식으로 인해 규칙이 언제나 바뀌는 게 아니기 때문에) 화면 밖의 소리는 다른 소리들과 동일한 현실의 장소로부터, 다시 말해 동일한 확성기로부터 나온다. 펠리니의 영화에서처럼 '화면 밖'에 있기도 하고 '안'에 있기도 해서 소리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경우들도 물론 있는데, 분명하지 않으면 그것을 모순적이라고만 해야 하는가?
결국 우리는 극장의 무대와 비교해서 실제적으로 후퇴해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무대 뒤의 목소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 무대는 영화의 화면과 달리 하나의 시각에서 다른 또 하나의 시각으로, 클로즈업 쇼트에서 롱 쇼트로 건너뛸 수 없다. 관객이 볼 때 영화의 음성 존재는 '외화면,' 즉 영상 밖에 있는 동시에 영상 안에 있으며, 그 뒤에서부터 실제적(고전적인 영화) 또는 가상적(텔레비전 · 자동차 극장 등)으로 나온다. 마치 목소리가 한 곳에 정착하기 어려워서 표면을, 곧 밖과 안을 동시에 떠도는 것처럼. 목소리가 어떠한 육체에 정상적으로 거하는지 보여주지 않았을 때 특히 그렇다.
안에도 밖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이것이 영화 속 음성 존재의 운명이다.

음성 존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음성 존재는 보여졌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아직 보여지지 않은 경우에는 음성 존재의 목소리들 중에서 가장 하찮은 것도 영상 안으로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신기한 능력들, 대개는 불길한 능력과 매우 드물게 수호의 능력을 부여받는다. 목소리가 영상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목소리가 관찰자로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능한 포함 관계, 즉 양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능력과 소유 관계를 갖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보여지지 않은 목소리(예를 들면 《마부제 막사의 유언》에서 마부제 박사의 목소리와 오퓔스 감독의 《쾌락》의 첫 두 편의 스케지에서 모파상의 목소리가 있다)는, 그것의 출저로 가정된 육체가 아직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일종의 처녀성을 갖는다. 탈음성 존재화, 달리 말하면 결국 말하는 사람을 보여주는 간단한 현상은 언제나 순결을 빼앗는 것과 같이 음성 존재의 처녀성과 관련된 능력들을 잃게 만들지만 목소리를 인간의 위치로 돌아오게 한다.
아직 보여지지 않은 목소리와 대칭을 이루는 아직 말하지 않은 육체, 즉 말없는 등장 인물을 무성 영화의 등장 인물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정확하게 대칭적인 이 두 인물들은 서로 닮았고, 많은 점에서 일치한다(말없는 등장 인물에 관한 장 참조). 영상 전체, 줄거리 전체, 영화 전체가 음성 존재가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중단될 수 있다. 따라서 그것들의 목적은 음성 존재를 규명하기 위한 탐구로 귀착된다. 《마부제 박사》 《사이코》와 같은 영화들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괴물이나 빅보스 · 악령 또는 매우 드물지만 현인 등등의 '음성 존재의 활동을 중지시키는' 일과 관련된 수많은 탐정, 괴기 이야기들의 동기를 우리는 알아보게 될 것이다. 필자가 이미 언급했듯이 음성 존재는 허풍쟁이나 해설자, 환등기 목소리의 외진 자리에 있으면 당연히 안 되지만 목소리는 영화의 장소인 영상 속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그고 있어야 하며, 영화 무대의 내부도 연극 무대 뒤도 아닌 잠시 들르는 곳ㅡ이름은 없지만 영화가 끊임없이 다루는 곳ㅡ에 붙어야 한다.
스크린 안에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거기에 있으며, 스크린 안에 들어가지 않은 채 표면을 떠돌아다니는 음성 존재는 불안정과 긴장의 요인이고, 보러 가게 하는 이끎이며, 파멸로의 유도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음성 존재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그리고 음성 존재는 어떠한 능력들을 가지는가?
그의 능력은 다음의 네 가지로 귀착시킬 수 있다. 곧 도처에 존재하고,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알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 달리 말하면 편재(遍在) · 투시 능력 · 전지(全知) · 전능(全能)이다.
음성 존재는 도처에 있고 그의 목소리는 정해진 위치도 실체도 없는 육체에서 나오며, 그 어떤 것의 방해도 받지 않는 듯 하다. 전화기나 라디오처럼 아쿠스마티크한 목소리들을 돌아다니고 이곳저곳에 동시에 존재하게 하는 매체들은 종종 영화에서 음성 존재의 편재를 구체화하는 데 사용된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말하는 컴퓨터 핼은 우주선 전체에 거한다.
음성 존재는 모든 것을 보고, 그의 말은 신의 말씀과 같아서 "어떤 피조물도 신 앞에서 숨을 수 없다." 이 목소리는 화면 안에 있지 않지만 화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찰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으며, 당신이 보지 못하는 이 목소리는 당신을 보는 데 가장 좋은 자리에 있는데, 어쨌든 이러한 능력은 당신이 준 것이다. 늘 당신 뒤에 있을 음성 존재를 불시에 보려면 뒤돌아서고, 또 그렇게 계속하라. 시력으로써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그는 강박적이고 편집광적인 성격의 무엇이든 한눈에 다 보는 환상이다.
많은 영화들이 전체를 보는 목소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예를 들면 프리츠 랑의 《마부제 박사의 유언》에서 두껍고 불투명한 커튼을 꿰뚫어 보는 '우두머리'의 목소리와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우주비행사들이 자기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못 듣게 했어도 그들의 입술을 보고 알 수 있었던 '목소리의-존재,' 즉 컴퓨터 핼의 목소리 혹은 구석진 자리에서 전체를 볼 수 있는 내레이터의 고전적인 목소리, 장면이 이동하는 어디나 돌아다니고 절름발이 악마에게서처럼 아무것도 그 앞에서 숨을 수 없었던(오퓔스의 《다정한 적》) 보이지 않는 유령의 고전적인 목소리들, 그리고 스릴러 영화에서 전화를 걸어 "너는 나를 보지 못하지만 나는 너를 본다"라는 화제로 희생자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발신자들의 목소리들이 있다.
존 카펜터의 괴기 영화 《안개》는 대단히 기발한 형태의 투시 능력의 환영을 등장시킨다. 여주인공(아드리엔 바르보)은 한 용도 변경된 등대에 설치된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디스크자키로 일하는데, 방송국은 위에서 도시 전체를 굽어본다. 영화 속의 다른 인물들은 그녀를 자신들이 처한 상황(도시는 불길한 안개로 뒤덮인다)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하나의 목소리로 인정한다. 사람들은 안개로 인해 지표를 잃는데, 이 안개를 꿰뚫을 수 있는 것은 투시 능력이 구체화된 등대로부터 나오는 라디오 방송의 목소리뿐이다.15)
전체를 다 보는 음성 존재가 일반적이고, 전체를 다 보지는 못하는 음성 존재의 목소리는 이례적이고 이상한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역행적이지만 분명한 형태의 투시성의 모티프를 발견한다. 조셉 폰 스턴버그의 《아나탄의 전설》에서 이야기는 일본 병사들이 좌초한 한 섬에서 전개되고, 그들의 대화는 일본어로 진행된다. 이 장면은 서구 관객을 위해 더빙되거나 자막 처리되지 않고 스턴버그 감독의 보이스 오버를 통해 영어로 설명되는데, 그는 의외로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병사들 집단의 '이름으로' 말한다. 이 '우리'라는 단어는 그룹 전체가 아니라, 섬에 있는 유일한 여성과의 모든 관계에서 제외될 대다수의 사람들을 총괄한다. 실제로 영상과 동시적인 일본어 음향이 우리를 오두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상대와 함께 있는 여자를 발견하게 하는데,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지 못하며 예측만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로 말한다("우리는 볼 수 없었다"). 카메라의 눈과 달리 목소리는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음성 존재인 내레이터의 목소리와 카메라의 삼가지 않는 시선 사이의 분리는, 볼 수 없다고 말하는 그 목소리가 사실은 전체가 보일 듯한 외화면에 있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며, 화면 안의 이야기 속에 없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게 한다.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상당한 기만을 가정하려고 한다. 말하는 목소리가 내거는 '우리'란, 말하자면 개별적인 그 누구도 지칭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하는 특정한 개인을 많은 병사들 중에서 알아내기도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언 송》의 접수계에서 들을 수 있는 아쿠스마티크한 목소리들 대부분은 전체를 보지는 못하는 목소리들로서 말을 한다. 이 부분적으로 보는 것, 곧 부분적으로 아는 목소리는 스턴버그의 '우리'가 오두막의 남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선 부영사와 안 마리 스트레테르 부부에게 영향을 미친다. 조금 뒤에 다른 예를 들어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것은 불완전한 시력을 지닌 음성 존재가 원초적인 장면과 뭔가 관련이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암시해 준다. 음성 존재가 못 본다고 말하는 것은 부부가 하는 행동이다. 베르톨루치의 영화 《어리석은 남자의 비극》은 바로 이런 식으로 원초적인 장면의 패륜적인 역전 주변(아들과……프랑스어 번역에 따르면, 어머니가 함께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이가 아버지이다)을 찍는다. 그리고 영화 초반 아버지는 공장 지붕 위에서 아들로부터 쌍안경 하나를 선물로 받고 모두 다 볼 수 있는 양하며 즐거워한다. 그런데 베르톨루치는 우고 토그나치가 연기한 아버지에게 독특한 '내면의 목소리'를 준다. 특히 아들과 관련해서, 그리고 그것이 전혀 보지 못하는 등 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그 목소리의 시력과 지(知)가 어디서 멈추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실제로 가장 당황스러운 때는 '그 어떤 한계가 없다'는 의미에서 무한한 지(知)가 음성 존재에게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때가 아니다ㅡ그의 시력과 지에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한계가 있을 때이다. 전부를 보고 아는 신에 대한 생각(성서에 기반을 둔 유대교 ·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이 세계 3대 종교의 신은 일종의 음성 존재이다)은, 니체의 소녀를 말했듯이 어쩌면 '정숙치 못할'지도 모르지만 거의 자연스럽게 되었다. 그 능력이 더기까지인지 모른 채 불완전한 시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서의 신에 대한 생각은 훨씬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전지전능한 음성 존재. 전부를 볼 수 있는 것으로 가정된 범위 내에서 음성 존재를 상기함으로써, 우리는 그에게서 나오는 능력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앞지를 수 있다. 우리의 주술적인 사고의 논리에서 전부를 몬다는 것은 전부를 알고, 또 앎은 안에서-보기와 동일시되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 혹은 그 성격이나 범위가 다양한 적어도 몇몇 능력들을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요지부동의 상태, 파괴적인 힘의 통제, 최면을 거는 행위 등).
무엇 때문에 한낱 목소리에 이 모든 능력들이 부여되는가? 어쩌면 어느 정도는 음성 존재인 이 거처 없는 목소리가 목소리만이 전부였고, 그것이 도처에 있었던('도처'라는 것은 오직 과거를 돌이켜 볼 때에만 의미가 있다. 이 개념이 유래된 기원에서 분화되지 않은 전부, 도처인 곳에 더 이상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이다) 출생 이전과 삶의 첫 시기의 시원적이고 본원적인 단계로 우리를 데려가기 때문일지 모른다.
따라서 발성 영화는 비오이 카사레스의 소설 《모렐의 발명》에서처럼 말하는 시뮬라크르들이 거하는 무대일 뿐만이 아니라 아쿠스마티크하고 기본적이며 결정적인 목소리들, 이미지를 내려다보고 뒤덮으며 생명력을 빼앗는 목소리들, 액션을 유도하고 초래하고 갑자기 생기게 하며 때로는 육지와 바다 사이의 경계에서 사라지게 하는 전능한 목소리들로 가득 찬 외화면이기도 하다. 물론 본원적이고 위대한 음성 존재는 여호화이고 우리들 개개인에게는 어머니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발성 영화가 음성 존재를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발성 영화는 다른 표현 양식들이 주지 못했던 음성 존재의 활동 영역을 발명하고, 이것으로 인해 발성 영화가 도래한 이후로 영화는 목소리에 좌우되었다.

탈음성 존재화

이와 같은 것들이 음성 존재의 능력들이다. 물론 말하는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의 육체를 프레임 안에 나타내는 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의 능력 · 전지성과 당연히 편재성을 잃을 것이다. 이것을 탈음성 존재화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음성 존재에게 한곳을 지정하며 "여기 너의 육체가 있으니,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에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음성 존재를 인간의 운명으로 이끄는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요, 목소리의 강생이다. 이는 사자(死者)의 혼에게 "이젠 방황하지 말고 여기 너의 무덤에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장례식과 같다.
가시적이고 한정된 개별적인 육체가 목소리에 지정되는 순간부터 평범한 사람으로 변하는 음성 존재를 우리는 많은 괴기 영화나 탐정 영화에서 보지 않는가? 보통 이때부터 음성 존재는 무해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인간적이 되고 약해진다. 보이지 않던 '빅보스'는 영상 속에 나타나면 보통 '하찮은 얼간이'로 여겨지거나 죽음을 당하게 된다(알드리치의 《키스 미 데들리》를 예로 들면서 파스칼 보니체르가 말했다).16)
목소리의 거처로 지정된 소멸하는 인간의 육체, 즉 어떤 장소의 폭로이자 이미지의 폭로인 탈음성 존재화는 몇몇 관점에서 노출 취미와 많이 유사하다. 그것은 반드시 단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점진적일 수 있다. 노출 장면에서 여성의 성기가 최후에 드러나는 것처럼(이후로는 남근의 노출도 불가피하게 되었다) 탈음성 존재화에도 최종적인 단계가 있는데, 그것은 목소리가 나오는 입이다. 말하는 등장 인물의 손과 등 · 발 · 목덜미 등은 보이지만 입이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은 불완전-음성 존재들(demi-acousmêtres) 혹은 부분적인 탈음성 존재화(désacousmatisations partielles)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는 머리는 정면을 보고 있지만 가려졌기 때문에 4분의 1의 음성 존재도 있다! 얼굴과 입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아서 관객이 목소리와 입과의 일치를 '확인'하지 못할 때(더구나 관대한 어림짐작의 확인) 탈음성 존재화는 불완전하며, 그 목소리는 요지부동의 신비한 힘이 있는 아우라(aura)를 간직한다.
빅터 플레밍이 감독하고 주디 갈런드가 주연한 《오즈의 마법사》에는 탈음성 존재화와 관련해서 재치 있고 대단히 설득력 있는 장면이 있다.
'위대한 오즈'는 프랭크 바움이 꾸며낸 마법사로서, 신전 같은 곳에서 커튼, 찌푸린 인상의 가면, 또는 연기 등의 장치들 뒤에 숨어 크고 굵은 목소리로 말한다. 우레와 같은 그의 목소리는 전체를 보고 아는 것으로서 말하기 때문에, 도로시와 친구들이 입도 열기 전에 그들이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와 당연히 받을 것을 요구하자, 오즈는 약속을 안 지키고 때를 기다리라고 한다. 도로시는 화를 내고, 그녀의 개 토토가 목소리를 향해 달려들어 커튼을 뜯어내자 그 뒤에 숨어 있던 목소리가 평범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소박한 증폭기와 연기 장치를 조작하면서 마이크에 대고 말하고 있었다. 위대한 오즈는 신과 대등하게 보이기 위해 숨어서 크고 굵은 목소리로 말하기를 즐기는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목소리는 '육체에 넣어진' 순간부터 거대한 규모를 잃고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 결국은 인간의 목소리로 말한다. "당신은 나쁜 사람이에요"라고 도로시가 말하자 "아니야, 도로시. 나는 매우 착한 사람이지만 아주 서툰 마법사일 뿐이야"라고 예전의 마법사가 머뭇거리며 말한다. 도로시에게 있어서 탈음성 존재화는 입문의 끝, 즉 부모의 전능화를 단념하고서 죽기 마련이며 과오를 범하기 쉬운 아버지를 발견하는 순간을 나타낸다.
2. 마부제 박사의 침묵

1932년 프리츠 랑과 테아 폰 하르보우는 1922년에 만든 무성 영화 《도박사 마부제 막사》의 속편을 구상하여 그들의 주인공, 즉 정신병질의 악의 화신을 새로운 모험을 위해 다시 내보낸다. 그들의 길은 완전히 그려진 듯하다. 영화에 목소리가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악마 같은 최면술사에게 멋진 목소리를 주고서 관객들에게 "마부제 박사가 말을 하다"라고 홍보하기가 대단히 쉬웠을 것이다 《안나 크리스티》의 홍보 문안이 "가르보가 말을 하다!"였듯이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지 않고 정반대로 하는데, 상황에 따른 일이긴 했지만 대단히 멋진 생각이었다. 그들은 마부제 박사의 목소리를 들려 주지 않기 위해서, 보다 정확히 말해 그 목소리를 절대로 인간의 육체와 결합시키지 않기 위해서 바로 발성 영화를 이용한다는 셈이었다. 마부제 박사에게 부여된 목소리는 결국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밝혀질 것이지만, 오직 커튼 뒤에서만 들려온다. 진실, 즉 본래의 진짜 마부제 박사, 여전히 그 매부리코의 루돌프 클라인 로게가 맡은 마부제는 고집스럽게도 죽을 때까지 말이 없다. 우리의 늙은 마법사의 비인간적이고 비현실적인 목소리로 말하는 그를 이중 인화된 환영의 상태로만 보게 된다. 그리고 생존시의 마부제 박사가 침묵하기 때문에 모든 물질적인 매체에서 분리된 채 커튼 뒤에서 그의 이름으로 말하는 목소리는 우리가 그에게 준 악마적인 능력들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말없는 육체와 육체 없는 목소리, 무시무시한 마부제 박사는 제대로 군림하기 위해 이처럼 분리된다.
《마부제 막사의 유언》의 작가들이 마부제 박사를 벙어리로 만든 데에는, 그리고 이것이 새 에피소드의 제목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루돌프 클라인 로게는 프랑스어를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마부제 박사의 유언》은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듯이, 같은 무대 장치에서 두 부류의 다른 출연진들이 참여하여 독일어와 프랑스어, 두 언어로 촬영되었다. 더빙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영화를 다른 언어권으로 배급하기 위해 찾아낸 이 방법은 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랑과 폰 하르보우는 말없는 마부제 박사를 연기한 주역 배우를 아마 프랑스어판에서도 그대로 쓰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리서 듣지 못하는 영화(cinéma sourd)로 만들어진 초기의 모험들에서 결코 벙어리가 아니었던(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부제 박사가 '발성 영화'라는 위업 초반에 침묵 속으로 빠져들 것을 예상케 하는 교묘하고도 확실한 장치가 생겨난다. 마부제 박사의 이름으로 말하는 목소리는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올 것이고, 따라서 오직 다른 배우들에 의해서만 구체화될 것이다.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어째서 당신의 마부제 박사는 말이 없는가!"라고 말을 맺는다. 과연 그렇다. 그것은 매우 기발한 생각이어서 시나리오 짜임 자체에 굉장한 결과를 초래했다.
1) 《마부제 박사의 유언》의 서술 구조는 언뜻 보기에 처음에는 끈이 보이는 것 같지만, 조금씩 덮이고 '채워지는' 진주 목걸이처럼 짧은 신(scène)들의 끝과 끝을 연결하여 만들어진 목걸이를 연상시킨다. 초반의 한편에 말없는 마부제 박사가 있고, 또 다른 한편에 그의 이름으로 말하며 이야기가 3분의 1 정도 진행된 뒤, 그가 죽은 뒤에도 살아남는 목소리가 있다. 종국에는 불가사의했던 모든 것이 이성적으로 설명되어 커튼 뒤에서 들려왔던 그 육체 없는 목소리는 마부제의 최면에 걸린 보호시설 원장, 바움의 것으로 드러난다. 언뜻 보면 '적절한 목소리'가 적절한 육체에 넘겨지고, 말하는 육체, 즉 비음성적 존재(anacousmêtre)와 재결합되는 듯하다. 막.
이 영화를 한번 보면 모든 의문점들에 이성적으로 답을 제시하는 듯한 결말에 거의 만족하게 되겠지만. 여러 번 다시 보면 볼수록 영화는 정말로 고리가 닫힌 게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바움이 언제 자신의 목소리를 마부제 박사에게 빌려주는지 결코 보지 못하지만, 켄트가 그의 사무실 문 앞에서 목소리를 듣고 간단하게 알아내는 것을 보고서 말하는 사람이 그라는 것을 쉽게 추리해 낸다. 달리 말해 켄트는 (음반을 통해) 전달되는 목소리 속에서 (확성기를 통해) 전달되는 또 다른 목소리를 단지 식별하고만 있다. 우리는 바움이 소리를 내보내는 것을 보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그곳 말고 다른 곳에 있다는 점 말고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의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관객이 생체 내, 커튼 뒤, 사무실 문 뒤라는 세 가지의 발현 형태하의 바움의 목소리를 어떻게 해서 분명히 알아채지 못하는가? 그것은 목소리라는 것이 혼란스럽게 하며 가변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단번에 식별이 되는 목소리려면 독특하고 두드러지는 특징(억양, 꽤 쉰 목소리 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남을 속이기 위해 목소리를 사용하며,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 켄트가 음성 존재를 폭로하려고 찢어 버린 커튼 뒤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기대했던 멀쩡한 육신의 인간이 아닌 하나의 기계 장치를 보게 된다. 마이크와 확성기와 나팔, 그리고 어두운 커튼(잠깐 동안 뒤가 환해졌을 때) 뒤에서 역광으로 인해 드러났었고 지배자의 존재를 믿게 하는 데 이용되었던 뚜렷한 윤곽의 그림자 말이다. 그러면, 모두 설명해야 한다면 이 장치에 없는 것은 없는가? 있다. 카메라의 눈이 없다.
사실 목소리는 커튼 앞에 출두한 사람들의 아주 작은 몸짓에도 실시간으로 반응하며 보는 목소리로서 움직였다. 목소리와 귀를 중계하는 기계들을 보여주었는데, 그렇다면 광학 기계, 즉 눈을 중계하는 기계는 어디에 있는가? 어느곳에도 없다. 목소리의 천리안은 마법, 즉 '멀리서 최면을 거는' 능력에 맡겨진다. 물론 텔레비전이 아직 있었을 때였지만 그 개념은 이미 존재했었다. 1926년 《메트로폴리스》에서 텔레비전의 전조를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스크린이었고,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문제를 제기하는 카메라이다. 스크린과 카메라를 보여주는 것은 별개의 일이고, 후자의 경우는 눈과 기계를 동시에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 외안을 고안해야 한다. 1961에 제작된 마지막 《마부제》 작품은 천장 크리트에 흩어져 있는 눈들이라는 단순화된 형태로 카메라를 보여줌으로써 끝이 난다.17)
가장 인상적인 것은 카메라의 부재에 대해 아무도 동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코 카메라를 암시하지 않는 켄트와 릴리(두 사람은 자신들이 발견하는 장치에 대해 한마디도 안하고, 둘이 얘기할 때나 로만 앞에서 말할 때에도 그것의 이름을 대지 않는다), 그리고 관객도. 우리를 바라보는(흔히 말하는 바로 그 카메라의 시선으로) 켄트나 릴리의 아연실색한 얼굴 앞에는 나타났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본 것을 관객들도 볼 수 있게 역쇼트로 보여주지 않는 혹은 보여줄 수 없는 카메라는 기껏해야 거울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만을 찍을 수 있으며, 본래 촬영이 불가능한 바로 이 영화의 촬영 카메라가 아닐까?
그 눈은 음성 존재의 목소리 자체 안에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기 위한 눈이라는 기관은 전혀 필요없었던 것이다.

3) 들어가려고 손잡이에 힘을 주자 "방해받고 싶지 않다"라는 말만 계속 울려대는 곳, 즉 바움의 사무실의 금지된 문을 부수고 나서 우리는 결국 무엇을 발견하는가? 순전히 기계로 움직이는 하나의 장치를 발견한다. 문제의 그 문장이 녹음된 음반을 작동시키는 기발한 기계 시스템 말이다. 침입자 자신은 출입이 금지되지만 손잡이를 작동시킴으로써 목소리의 동인이 된다. 아쿠스마티크한 장벽을 넘는데 자발적으로 이성을 잃은 상태, 즉 지배자의 힘을 믿으려는 욕망 외에는 다른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우리는 여기에서 결론지을 수 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처럼 모든 일은 스스로 속기 원하는 사람들을 속이는 데 꼭 알맞은 기계류, 즉 눈속임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폭로가 우리에게 숨기고 있는 명백하고 가장 중요한 점은, 영화 속의 인물이나 관객들 모두 동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 사이에 없어져서 문 뒤에도 커튼 뒤에도 없는 사람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이다.
마부제 박사와 바움, 또는 명령을 내리는 그 누구든 그들 무리 중의 몇몇이 커튼 앞으로 출두했을 때 우리는 그들이 어느 시설에서 대략적으로 어느 구역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며, 앞으로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출두 장면의 몽타주는 커튼 뒤 목소리의 주인을 바움으로 생각하게 하면서 동시에 사무실에서 글을 읽고 있는 사람도 그일거라고 믿게 만든다(프리츠 랑의 감수하에 보충하고 더빙한 미국판에서는 몽타주와 대화들을 변화시켜 이 논리적 결점들을 없애지만, 필자가 언급하고 있 는 것은 원래의 독일어판이다).
이렇게 커튼과 문 뒤라는 마땅히 있어야 할 지배자의 자리에서 목소리를 전달하는 기계를 폭로하는 두 개의 탈음성 존재화 장면은 가리개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것도 이중으로.
ㅡ 이 장면들은 음성 존재를 폭로하는 일을 나중, 한참 뒤로 미룬다. 다시 말해 영원히 어느곳에서도 폭로하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
ㅡ 그러면서도 그 다른 곳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죽은 마부제 박사를 대신해서 그와 자신을 동일시하는(노먼이 죽은 어머니의 혼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독방에서 끝을 맞게 되는 《사이코》의 결말과 같이) 바움이라는 사람과 함께 완성되는 듯, 완벽하게 고리가 연결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어울리지 않는 모든 요소들은 끼여지지는 않지만 마치 그렇게 되는 체하는 줄거리의 뒤섞인 퍼즐 조각들처럼 남는다. 유언장 집필이 완성된 후 얼마 안 있어 죽게 된 마부제 박사의 몸은 영원히 말이 없고, 자동기술법으로 작성된 그의 유언장은 끔찍할 정도로 매우 힘들게 만들어지며, 튀어나온 눈의 마부제의 환영은 분장한 얼굴이 신들린 상태에 있는 주술사의 남녀 양성 목소리로 바움에게 두 번 나타나고, 음성 존재의 남성적이고 단호한 달라진 목소리는 커튼 뒤에서 그의 이름으로 말하며, 바움이 사무실에 있을 거라고 생각될 때 그곳에 없으며 논리적으로  다른 곳에 있어야 할 때 그곳에 존재하고, 결국 마부제라는 이름은 말해지고 써지는 등 다양한 형태로 순환한다. 이 모든 조각들은 하나의 몸과 목소리와 이름의 결합체를 구성할 수 있게, 그렇게 결합한 비음성 존재(Anacousmêtre)가 제한적이고 포함되고 예속되고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약한 하나의 인간이 되도록 주어지지 않는다.
배덕 행위는 지속되어 커튼 뒤에 있는 보스가 그가 이름을 빌린 마부제라는 인물의 신원에 대해서까지 의심이 인다. 켄트는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커튼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를 식별하자, "보스의 목소리다!"("Das ist die Stimme des Chefs!")라고 외친다. 흩어진 모든 요소들을 다시 끼워맞출 수 있을 만한 이름을 대지 않고서 말이다. 소리내어 불려지는 이름과 씌여지는 이름 사이, 박사의 말없는 육체와 바움의 말하는 육체 사이, 그리고 비음성 존재의 목소리와 보스의 목소리로 나누어진 바움의 목소리 사이에ㅡ프리츠 랑의 영화는 기계의 가공의 일부분을 조직한다. 우리는 전체를 재구성했다고 믿으며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지만 다른 곳에서 또 다른 하나의 공백을 드러내고, 계속 이것을 반복한다. 지각할 수 없고 문자 그대로 '탈음성 존재화할 수 없는' 음성 존재, 즉 마부제라는 인물을 《마부제 박사의 유언》의 작가들이 특별히 만들어 냈기 때문에 그들은 육체 없는 목소리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 하나의 영화 속에 집결시킬 수 있었다고들 할 것이다.
사실 영화 속에서 음성 존재란 무엇인가? 어쩌면 피타고라스처럼 커튼 뒤에서 말하는 스승일 수도 있고, 혹은
ㅡ 스스로를 다른 사람으로 여기게 하는 사람.
ㅡ 자신이 어디에서 얘기하는지 말하지 않는 사람(전화 통화에서처럼).
ㅡ 말을 하는 죽은 자의 목소리(《선셋 대로》에서처럼).
ㅡ 어떤 기계적-실체 자체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마부제 박사의 유언》은 계속 축적되는 논리적 모순들에 대해 적정함 없이 음성 존재와 관련된 이 모든 가능성들을 섞는다.
요컨데 마부제 박사는 그를 만들어 낸 사람들 외에 아무도 아니고, 어디에도 정착되지 않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이 명백한 듯하다. 만일 마부제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정체 없는 이름, 목소리 없는 육체, 출저 없는 목소리 안에, 그리고 해체된 원소들의 총체적인 불합리 속에 있다. 그것은 있을 수 있는 모든 음성 존재들이고 누군가이며, 결국은 하나의 음성 기계(acousmachine)이다.

음성 기계를 찾아서

《마부제 박사의 유언》에서 켄트가 보스의 현존을 위장하는 기계 장치를 폭로하는 중요한 순간으로 되돌아가 보자. 사람들은 그를 벌주기 위해(그는 보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릴리와 함께 커튼이 있는 그 방에 가둔다. 그때 목소리가 울린다.

마부제의 목소리: 켄트! 자네에게는 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할 임무가 주어졌었다. 그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군. 이러한 불복종은 반역죄에 해당하지. 자네들 두 사람은 사형이다.
켄트: 여자는 가게 해주시오!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할 테니 여자는 놓아주시오.
목소리: 당신과 여자는 이곳에서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켄트는 총을 빼들어 커튼을 향해 쏘고, 갑자기 어둠이 엄습한다. 관객은 이 어둠 속에서 섬광을 보는데 이제는 커튼이 있는 쪽이 어디인지 분간치 못하게 된다. 켄트와 릴리가 마주 대하고 있는 뒤쪽인가, 아니면 앞쪽인가? 조금 뒤에 커튼이 걷히는 소리가 나고, 켄트와 릴리는 그들 앞에 있는 것을 보고 얼이 빠져 관객 쪽을 향해 서 있다. 마치 그들이 발견한 것이 현실 세계, 곧 관객들이 들어차 있는 영화관인 것처럼!
180도 반대 방향에서 찍는 역쇼트가 그들이 보는 것, 즉 이미 언급한 그 장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켄트와 릴리는 장면을 묘사하지 않고, 릴리에게서 단지 "어머나!"라는 감탄사만 조그맣게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제는 드러난 확성기의 나팔에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목소리가 다시 말한다. "너희들은 결코 이 방에서 살아 나가지 못한다. 죽을 때까지 3시간밖에 안 남았다." 마침내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메트로놈 소리처럼 평범하고 규칙적인 째깍거림이 멈춘 목소리의 뒤를 이은다. 켄트가 말한다. "그게 뭐가 됐든 우리는 그것을 찾아 위험을 없에야 할 것이오."
뤽 물레는 이 시한폭탄처럼 째깍거리는 소리를, 영화의 첫 신에서 호프마이스터가 약하게 진동하는 방에 숨어 있을 때 보이지 않는 기계에서부터 들렸던 귀를 멍하게 하는 소음과 동일시하려는 의미심장한 오류를 범한다.18) 두 소리는 서로 달라서 켄트와 릴리가 듣는 소리가 아주 작고 간헐적인데 반해, 방에서 들려왔던 소리는 펌프에서 나는 엄청난 소음처럼 크고 연속적이었다. 기억의 오류 석에서도 물레의 생각은 옳았다. 두 개의 소리는 모두 엄격한 규칙성을 갖고 무시무시한 아쿠스마티크한 기계들의 심장 치는 것을 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음성 기계는 어디에서부터 생겨났는가? 바로 목소리가 멈춘 데서부터다. 마치 음성 존재 자체가 음성 기계로 변한 것처럼 말이다. 조금 전 커튼이 목소리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을 때 목소리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켄트와 얘기했었다, 아니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후 커튼에 대한 모독과 한 발의 발포가 있은 다음에도 목소리는 아무것도 못 보고 못 들은 양 앵무새처럼 거듭 죽음을 통고 한다. 바로 이 장면의 의미를 미국판은 더빙을 통해서 바꾼다. "멍청한 바보 같으니라구!" 하며 목소리는 금방 벌어진 일에 반응하고, 살아 있는 어떤 존재를 중개하듯이 계속해서 작동한다. 음성 존재가 기계 장치임을 밝히는 본래 독일어판의 기계적인 구절이 훨씬 더 강렬하고 당혹스럽게 함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영화와 에피소드의 연출이 은유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의 남녀가 커튼을 걷어내고 발견하는 것은, 가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가상에 대한 자신의 신념에 영향을 미치는 장애물에 복종하지 않으며 스크린, 즉 자기 자신을 숨기는 커튼을 찢고서 가짜의 입체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영화의 관객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관객은 무엇을 보게 되는가? 확성기 한 대와 윤곽이 뚜렷한 밋밋한 그림자, 다시 말해 살아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의 기계 장치를 보게 된다. 어떻게 보면 켄트와 릴리는 자신들이 녹음기, 즉 테이프 돌림 장치 안에 들어와 있다고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기계는 그들의 눈앞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그것과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과, 영화의 관객이 환상에서 깨어날 때에만 녹음된 시뮬라크르로 밝혀진 음성 존재 앞에서 그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 역시 보고 싶어한 어떤 것 앞에서 몹시 놀라는 그들을 보게 된다. 전형적인 랑의 방식이며 시선의 전환에 해당하는 180도의 역쇼트가 우리의 욕망을 채워 주며, 그들이 우리 쪽을 향하고서 보게 된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절대적인 역쇼트의 환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가까이 간다. 우리가 영화 속 인물들을 보는 것과 같이 그들도 우리를 볼 수 있고, 그들에게 보이는 우리와 영화관이 스크린 속으로 옮아 간다는 환상 말이다. 영화사상 첫 역쇼트 중 하나를 연극 공연에 대한 그리피스의 단편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고, 그 역쇼트는 극장과 관객들을 보여주지 않는가?
그러나 켄트와 릴리가 보는 것은 기계 장치일 뿐이다. 그들은 방 안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그들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시뮬라크르이기 때문이다ㅡ마찬가지로 말을 하는 음성 기계도 일종의 투사된 것과 같이 행동하고, 조금 전 켄트와 릴리가 한 일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기계 장치는 켄트와 릴리에게 시뮬라크르의 이미지를, 관객에게 시뮬라시옹으로서의 영화 자체의 이미지를 반사한다(무대의 커튼으로서의 커튼의 은유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켄트와 릴리, 그리고 관객은 계속 '잘 알지만, 그래도……'라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바움의 사무실에서 발견된 또 다른 '목소리를 내는 기계,' 곧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그들에 의해 작동되기 시작한 홈이 파인 닫혀있던 음반은 음성 기계가 아니었다ㅡ이 장치는 정확한 위치에 있고 이름도 언급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시야 속으로 완전히 들어온다. 반면에 켄트와 릴리가 갇힌 방 안에서 우리는 그 실재하지 않는 장소를 결코 보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들이 폭로한 마이크와 확성기는 그 장소가 존재함을 추측케 한다. 실제로 마이크는 어디로 연결되고, 확성기는 어디에서부터 나오겠는가? 숨겨진 시한 폭탄이 있는 중앙과 호프마이스터의 귀를 멍멍하게 했던 기계(이 기계가 다른 장면에서 본 정지한 윤전기이더라도 그것은 추리에 의한 일종의 재구성이며, 영화는 기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역시 우리는 보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완벽한 음성 기계는 도달할 수 없는 중앙이 있고, 정지시킬 수 없어야 한다. 에드거 P. 제이콥스의 이야기들에는 항상 지하의 은신처, 블레이크와 모머가 결국에는 도달하고 마는 중심, 즉 악랄한 기계 장치를 파괴하려면 도달해야 하는 곳, 살아 있는 듯한 심장이 등장한다. 《마부제》 시리즈도 그렇게 끝을 맺어 마지막 편(《마부제 박사의 천 개의 눈》)의 남녀는 결국 그 은신처에 있게 된다. 그러나 《마부제 박사의 유언》의 마부제 박사는 '올릭'도, 그의 음성 기계는 그것을 조종하는 누군가와 함께 어딘가에 깊이 숨겨져 있는 중심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소리, 찾을 수 없는 어떤 것이 움직이는 소리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메트로놈같이 정확한 시간의 비유, 즉 죽음으로 이끄는 순환하는 시간의 비유를 알아차린다. 어쩌면 태아가 '듣는' 박동 소리와, 인간의 몸속에서 듣는 신체 기관의 소리일 수도 있다. 뭔가에 귀를 기울이며 몸을 웅크린 호프마이스터의 첫 등장을 상기할 수도, 성인의 심장 박동 리듬에 따라 부르릉거리는 거대한 음성 기계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이러한 음성 기계의 거처란 없으며, 음성 기계는 장소의 발견 이전의 온 사방(tout-autour)에 있다.

거처 없는 죽음

큐브릭의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주인공, 컴퓨터 핼의 목소리는 우주 탐색선 디스커버리호 전체에 울린다. 큐브릭 감독은 핼의 '많은 눈들' 중에서 한두 개를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그것은 우주선 안 곳곳에 수도 없이 널려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일종의 붉은색 표지등에 불과하다. 그러나 큐브릭은 핼이 개입하거나 무엇을 볼 것 같을 때마다 눈을 시각적으로 강조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어째서 필요가 없는가? 핼은 무엇보다도 목소리이며,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커튼 뒤의 마부제 박사처럼 핼은 목소리 안에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핼은 그 부드러우면서도 변함없고 냉담한 인간의 목소리로부터 우주선의 모든 공간에 머무는데, 우리는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핼의 편재 · 투시력 · 전지 · 전능을 추측할 수 있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매력은 뛰어난 특수 효과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같은 방법상의 놀라운 절제에서도 나온다.
흥분한 핼에 의해 동료들이 제거된 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우주비행사 데이브 보먼은, 어떻게 핼이 자신을 해칠 수 없게 만드는가? 바로 음성 존재의 두뇌이자 심장인 곳으로 들어가면서이다.
핼의 최후를 보여주기 위해 굉장한 소음과 연기, 분출하는 파편들과 함께 폭발 장면을 찍었다면 진부했을 것이다. 큐브릭의 해법은 이보다 수천 배나 더 경제적이고 의미심장하다. 목소리로서 존재하는 핼은 자신의 목소리에 의해 그 목소리 안에서 죽게 되는 것이다. 데이브가 회로들의 접속을 끊어 나가자 핼은 그만 멈춰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면서 그의 목소리는 변하고 흐트러지며, 결국에는 속도가 느려지는 음반처럼 기과하게 저음으로 떨어진다. 불이 꺼지는 붉은 눈의 이미지로 강조된, 이 고요 속으로 미끄러지는 목소리의 변화가 음성 존재의 죽음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다.
그러나 그의 의사(擬似)-의식이 직접적으로 언급한("부탁이니 멈춰라, 데이브…… 나의 뇌가 비어 가고 있는 게 느껴진다. 뇌가 비고 있어") 최후의 순간에 핼이 주체에서 비주체로, 살아 있는 음성 존재에서 기계 장치로 변하는 자동적인 이양의 명확한 순간이 있었다. 커튼이 걷힌 후에 음성 존재 마부제가 기계 장치로 변했을 때와 같이. 그 순간은 반응 없는 애절한 호소 뒤에 핼이 음조를 바꾸어 젊은 컴퓨터의 원기를 되찾은 목소리로 사설을 늘어놓기 시작할 때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이 가르쳐 준 이미 다 만들어진 문구 "안녕하세요, 신사 여러분. 저는 모델 번호 9000인 컴퓨터입니다……"라고 말할 때 말이다. 이때부터 핼은 "데이지, 데이지, 제발 대답해 줘요, 미칠 것 같아요……"라고 노래가 흘러나오는 한낱 소리의 기록과 다르지 않다. 그것도 곧 멈추고, 더 이상 핼에게서가 아닌 다른 데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데이브에게 임무의 목적을 알려준다.
《마부제》 연작에서와 마찬가지로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음성 존재에서 음성 기계로 변하는 순간이란 지각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고, 단지 그 이전과 이후에 파악되는 어떤 것이라는 점이다.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의 장면 전환이란 없고, 단지 콜라주만 있는 것이다.
자동적인 이양이란 어쩌면 시뮬라크르에서 살아 있는 것에서부터 이미지가 '떨어져 나오는' 순간, 그리고 그 살아 있던 것이 순진히 기계적 녹화인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죽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에드거 포의 《타원형 초상화》나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오귀스토 제니냐의 《미의 대가》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영화에서 루이즈 브룩스는, 영사실에서 자신의 첫 영화 《열정적인 가수》를 보던 중 질투에 사로잡혀 남편에 의해 살해당하는 젊은 스타의 역을 맡는다. 영화는 그녀가 죽은 뒤 스크린 전체를 뒤덮는 소리와 이미지로 그녀를 다시 살려낸다. 마치 원형이 죽음으로써 시뮬라크르에게 기계의 충만한 생명력을 주는 것처럼…….
그런데 음성 존재 핼의 죽음이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어쩌면 그의 죽음에는 거처가 없으며, 목소리 자체가 바로 소멸을 알리는 기계 장치의 거처라는 점일 것이다. 째깍거리는 소리로 이어지는 마부제 박사의 동일한 목소리의 반복, 핼의 목소리의 점진적인 변화…… 흔적도 육신도 남지 않는 기묘한 죽음이다.

죽은 사람이 말을 하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귓전에 울리는 그 목소리는ㅡ실제의 격리 속에서! 그러나 또한 영원한 갈라짐의 전조이기도 한 것이다! 수차, 아주 멀리서 나에게 말하는 그녀를 봄이 없이 그런 모양으로 귀를 기울이면서, 한번 떨어지면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는 심원에서 그 목소리가 부르짖는 듯한 생각이 드는 동시에 나느, 앞으로 어느 날, 어떤 목소리가 이와 같이(내가 영영 다시 보지 못할 육신에 이미 깃들이지 않고서 홀로) 되돌아오면서, 영영 유해로 된 입술에 스쳐갈 적에 내가 포옹하고 싶은 말을 내 귀에 속사일 때, 내 가슴을 조일 불안을 경험하였다."19) 20) 이와 같이 프루스트는 자신의 저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할머니의 아쿠스마티크한 목소리를 회상한다. 전화기와 축음기를 통해 목소리가 육체에서부터 분리될 수 있게 되자 목소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불러내고, 우리 이전에 이 기계 장치들이 발명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것들의 침울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영화에서 음성 손재의 목소리는 흔히 죽은 사람의 목소리로서, 《선셋 대로》에서 총을 맞고 수영장에 떨어질 때까지의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산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시신이 훼손되는 것을 '보는' 월리엄 홀던의 목소리, 맨케비츠 감독의 《허니팟》에서 결말 부분의 렉스 해리슨의 유령의-목소리(자기 사후에 실패한 계획들에 자신은 어찌할 수 없음을 말하는 목소리), 그리고 오퓔스 감독의 《쾌락》에서 검은 스크린 안쪽에서부터 들려오는 모파상의 목소리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목소리들에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소설 《검은 고양이》의 유명한 문장, "나는 죽었다고 말하잖아요"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장 자체에 모순을 품고 있는 듯하지만 절대로 모순명제가 아닌 모순어법의 문장이다. 각 어구의 의미들이 즉시 파악된다.
영화에서 죽은 사람이 육체 없이 스크린 표면을 떠돌아다니는 목소리로서 계속 말하는 것 말고 무엇이 더 자연스럽겠는가? 목소리는 특히 영화에서 영혼 · 그림자 · 분신, 즉 육체에서 떼어지고 실체가 없는 닮은 것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은가? 이것들은 죽을 때에도 살아남고, 심지어 살아 있을 때에는 육체를 떠나 있기도 한다.
이 목소리가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면, 내레이터의 보이스 오버는 흔히 삶을 마감하고 죽음만을 기다리는 거의 죽어가는 사람의 목소리이다.
3. 자아의 목소리에 관하여

종종 영화에서는 죽은 사람도 아니고 거의 죽어가는 사람도 아닌 누군가가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현재의 액션은 정지한다. 그리고 내레이터의 목소리는 육체에서 떨어져 나와 그 설명들에 의해 되살아난 과거의 영상에 깃들어 음성 존재로서 다시 돌아온다. 이 목소리는 일시적으로 멈춰진 어느 순간에 어떤 지점에서 말한다. 그래서 이것은 '자아의 목소리(voix-je)'가 되는데, 이는 단지 1인칭 단수를 사용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목소리가 울리고 공간을 점유하는 어떤 방식과 귀와의 상당한 근접성, 관객을 둘러싸며 자기를 식별하도록 이끄는 어떤 방법 때문에 특히 그런 것이다.
영화 속에서 이야기하고 설명하며 과거를 환기시키는 육체 없는 목소리들, 곧 음성 존재의 목소리들을 일컬을 때 프랑스어로ㅡ이렇게 말해도 좋다면ㅡ'화면 밖의 목소리(voix-off)'라고 한다. '육체 없이'라는 말의 의미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육체에서 떨어져 나와 외곽의 음성 존재의 영역을 맴돌며 일시적으로 육체 밖에 있다는 것이다. 이 목소리들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기억해서 자신들이 떠오르게 한 보이고 들리는 과거의 현존, 즉 플래시백에 덮여 버린다.
물론 내레이터의 목소리를 영화가 고안해 낸 것은아니다. 이야기에 곁들이기 위해 오페라 음악, 오케스트라 박스의 음악을 끌어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이전부터 존재했던 이미지 조종사의 목소리를 끌어들였다. 자크 페리오의 저서 《그림자 소리에 관한 수기》를 참조할 수 있다. 이것은 큰 소리로 읽힐 목적으로 씌여진 텍스트들과 함께 18, 19세기 전원의 풍경들을 차례대로 묘사하는데, 때때로 '라디오 뉴스'라 불렸다. 그러나 필자는 좀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어두워지면 목소리가 이미지들을 보여주고 사물들을 배치하며, 그것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이름을 붙인다. 이미지들의 첫 조종사는 어머니인데, 그의 목소리는 문자기호를 학습하기(가능성 있는) 이전에 사물들을 실제적이면서 상징적인 시간 속에 뚜렷이 드러나게 한다. 전통적인 해설자의 보이스 오버와 이야기 화자, 사설가의 기능에는 이와 같은  본래의 역할이 계속 남아 있다.
영화에서 이 목소리가 말을 하는 곳은, 연사나 등산가가 실제로 서서 자신이 이룬 일에 대해 언급하는 곳과 비교할 만한 무대, 영상에서 뒤로 후퇴한 곳과 같다고 필자는 말했었다.
내레이터가 실제로 존재하든 사운드트랙에 녹음되었든 영화 필름의 목소리가 뒤로 물러나 있는 이미지 조종사의 자리에서부터 우리에게 말을 하는 한 영화가 우리에게 옛 환등기의 그리운 목소리, 무릎 위에 앉은 아이에게 말을 하는 어머니나 아버지의 커다란 베일처럼 아이를 감싸는 목소리와 비교해서 특별한 것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영화가 부모님의 것과 유사하고 강한 목소리의 존재를 되찾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생명 · 묵계 · 가능성 있는 교류를 잃게 할 것이다.
목소리가 스크린 속의 장소에 얼마간 '들어가 있을' 때, 화면 안에 포함되는 것이나 카메라의 눈을 피하며 영상과 생생하고 극적인 관계를 맺을 때 이것은 변한다. 《위대한 앰버슨가》의 마지막 쇼트에서 빈 화면에 마이크가 나타나 내레이터가 말을 하고 있는 화면 밖을 가리킬 때, 우리는 웰스 감독의 목소리를 생각한다. ㅡ그는 거의 보일 뻔했고, 이것으로써 그의 목소리는 고전적인 '보이스 오버'보다 더 깊이 영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세르주 다네의 말처럼 목소리가 '숨어 있는' 시점과 이미지 안으로 뛰어드는 시점 사이에 현저히 눈에 띄는 단절이 없기 때문에 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목소리를 이동시킬 수 있다.
그러나 자아의 목소리는 소설에서처럼 단순히 화면 밖 내레이터의 목소리만은 아니다. 발성 영화는 자아의 목소리가 그 자체로서 기능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색깔 · 공간 · 음색의 기준들을 체계화했다. 이 기준들은 실제적인 표준에 해당하고, 우리는 이것에서 매우 드물게만 벗어난다. 극적인 연기의 표준과 기술상의 녹음 표준들이 그 예이다. 이러한 기준들은 전혀 자의적인 것이 아니어서, 단 하나만 지켜지지 않아도 내레이션에 문제를 일으킨다.
영화에서 자아의 목소리란 소설에서처럼 단순히 '나는'이라고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관객의 동일시를 촉구하기 위해, 따라서 얼마간 그것에 관객을 적응시키기 위해서 자아의 목소리는 어떤 관점에서는 독일시의 축으로서 기능할 수 있고, 마치 우리 자신의 목소리, 즉 1인칭의 목소리인 것처럼 우리 안에서 울릴 수 있도록 배치되고 녹음되어야 한다.
자아의 목소리의 기술상의 기준들은 특히 다음과 같다.
1) 마이크에 대한 최대 근접 기준으로서, 이것은 목소리와 우리의 귀 사이에 전혀 거리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목소리에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근접성은 최악의 청취와 재생 상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현존과 선명도에 대한 확실하거나 거의 그러한 음지수(音指數)를 통해서, 심지어는 '충실도가 낮은' 전화기를 통해서도 느껴진다.
2) 이와 동시에 두번째는 목소리를 에워싸는 반향의 부재, 즉 울리지 않음의 기준이다. 이것은 목소리가 속할 공간에 대한 느낌을 만들어 낸다. 마치 자아의 목소리가 우리의 것인 양 우리 안에서 울리기 위해선 특정하고 민감한 장소에 흔적이 남아서는 안 되는 듯하다. 자아의 목소리는 그 자체 내에 자기 고유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실제 자아의 목소리가 포괄적이고 암시적인 듯이 자아의 목소리가 포괄적이고 거리감 있게 하기 위해서는 음향 편집으로 충분히 인위적으로 울림을 첨가하거나 거리감을 줄 수 있다. 이제 자아의 목소리는 관객이 동일시하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어떤 공간 속의 하나의 육체로 인식되는 대상의 목소리(voix-objet)이다.
히치콕 역시 같은 영화 《사이코》에서 '내면의 목소리들,' 즉 매리언이 차를 몰고 도망갈 때 들려온다고 생각되는 대상의 목소리들과, 영화 끝부분에서 독방에 아무 말 없이 의기소침해 있는 노먼의 영상 위에 들리는 소위 '내면의' 목소리, 그러나 실제로는 어머니의 주체적 목소리(voix-sujet)인 자아의 목소리를 확연하게 구분하였다.
두 장면 중 첫번째에서 매리언(자네트 리)은 운전을 하며 자신을 믿었던 사람들, 은행장과 동료, 그리고 훔친 돈의 원래 주인인 거부에게 할 말들을 자기 마음대로 상상한다. 걱정하다가 나중에는 화를 내는 그들의 아쿠스마티크한 목소리들이 운전하는 매리언의 얼굴(히치콕에 따르면 '중성적인')과 그녀가 보는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단조로운 도로 풍경을 잡은 영상 위에서 들린다. 이 목소리들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리지만, 그녀가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불러일으키는 그녀에 대해 말하는 목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목소리들도 소리를 비현실화하며 '주관적인' 소리로 확립하는 것으로 두는 관례에 따라 기술적으로 조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영화에서 '주관적인' 인식은 주관적으로 대상화되는 것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자아의 소리(son-je)와 정반대이다. 《사이코》에서 이러한 조작은 목소리들을 전화기의 목소리들과 닮게 하려는 여과이며, 그녀의 머릿속, 상상의 장소, 즉 그녀의 상상계에 포괄하려는 인위적인 반향이다. 조작 전 《사이코》의 동시 녹음된 소리를 다시 틀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선별하거나 잔향이 생기게 하지 않고 가까이에 존재하는 동일한 목소리들을 동일한 영상 위에 재생한다면 관계가 뒤바뀌어 병합된 목소리들이 영상을 포함하고 조정하게 될 것이다. 즉 목소리들이 매리언에게 들리는 것으로 느껴지는 대신에, 매리언의 얼굴이 그 목소리들에 의해 떠오르는 이미지로 보일 것이다!
반면에 위에서 언급한 신들 중 두번째에서는 독방에 의기소침해 있는, 매리언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중성적인 얼굴의 노먼(앤소니 퍼킨스)을 보여주는 동안 어머니의 목소리가 편집광적인 독백을 늘어놓는다. 이것은 사람들이 말하듯 자신을 어머니와 전적으로 동일시하는 노먼의 내면의 목소리인가? 이것 이상으로 가깝고 뚜렷하고 간사하며 반향이 없는 그 목소리는. 노먼의 육체는 물론이고 전체 이미지와 관객들의 생명력을 빼앗는 자아의 목소리이다. 영상을 자기 안에 내포하는 목소리인 것이다.
이 두 개의 신이 병행 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두 장면은 모두 말이 없고 무표정한 얼굴을 클로즈업하면서 그 얼굴에 아쿠스마티크한 목소리를 덧씌운다. 그러나 매리언을 사로잡는 내면의 목소리들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리고, 노먼의 얼굴 위에서 말하는 내포의 목소리는 우리 안에서 울린다. 이것은 지하실에서 발견된 말라붙은 미라 속으로도, 자신에게는 안 어울리고 살아 있는 아들 노먼 베이츠의 육체 안으로도 들어가지 못한, 그래서 고통스러워하는 목소리이다. 그러므로 그 목소리는 자기 고유의 목소리를 내거나 한계를 정하지 못한 아들의 육신을 사로잡는다.
목소리가 우리의 몸 안에서 다른 사람, 즉 동일시를 전달하는 등장 인물의 몸의 떨림을 느끼게 하는 데에만 쓰일 때 관객의 투사와 신체적인 내포의 효과의 극단을 우리는 대화나 대사 또는 말에서가 아니라 근접한 숨소리나 거친 숨, 한숨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숨쉬고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 또는 그녀의 성별 · 연령 · 신원 등이 목소리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은 거리를 두고 생각하기가 종종 더 어렵다. 그 사람들은 우리 또는 너 · 그 · 그녀일 수 있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끝부분에서 살아남은 우주비행사 데이브의 숨소리를 예로 들 수 있다. 그것은 우주복을 입은 그 자신에게도 들릴 만큼 강하고 실제적으로 느껴지는데도, 그는 아주 작은 인형처럼 우주 공간 속으로 사라진다.
그 숨소리로 인해 저 멀리 우주 공간 또는 기계 속을 떠도는 정체불명의 인형은, 우리가 청각적인 모방으로써 동일시하려는 하나의 주체가 충분히 된다.
이와 동일한 신체적인 관련성의 효과가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에서 코끼리 인간이 트리브 박사의 연구실로 끌려가는 장면에 이용된다. 기형 인간은 여전히 복면을 걸치고 있어 우리는 그의 이목구비를 계속 보지 못한다. 그는 질문을 퍼붓는 박사 앞에서 꼼짝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신이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숨소리와 고통스럽게 침을 삼키는 소리를 매우 생생하게 듣고, 그의 두려움을 우리 몸 안에서 느낀다. 이 장면은 전적으로 소리에 의해 관점이 만들어지는 예이다. 더 이상 목소리의 문제가 아닌(코끼리 인간은 아직까지 말이 없다) 목소리 이전의 발현, 다시 말해 공기가 후두를 자극하기 이전의 발현이 문제가 되는 자아의 목소리의 궁극적인 단계이다.

집주인

관객이 목소리를 지각하며 그것에 의해 포위되는 것을 조금이라도 의식하면 목소리는 관객과 영상, 심지어는 등장 인물들까지 점유하기 위해서 자신을 잡을 수 있는 하나의 대상으로 가리키는 것을 피해야 한다. 파스칼 보니체르가 바로 ㄹ이러한 자아의 목소리의 '깨어나기' 효과, 즉 거리두기의 효과를 잘 분석해 놓았다.(부록 참조) "목소리의 몸(바르트에 따르면 목소리의 알맹이), 의미의 찌꺼기와 만나는 일은 목소리의 주체, 곧 객체의 일부로 전락하고 폭로된 주체를 나누어진 부분과 함께 만나는 일이다. (…) 결국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듣게 된다."21) 이렇게 육체로서 만나지 않으려면, 필자가 이미 언급했듯이 목소리는 울림 없는 전경에 놓여야 하고 투사되지 말아야 한다. 강한 인상을 주려면 연설을 하는 공간에서 올려야 하는 연사의 대중 연설과는 달리 말이다.
기트리와 콕토의 영화들에서 감독의 '화면 밖'의 개입은 어째서 그렇게 독특한가? 그들의 목소리는 내레이터 또는 자아의 목소리의 고전적인 역할을 떠맡으면서도 투사된 목소리들로서 자신들의 단독성을 과시하며 관례를 깨기 때문이다. 이 독특한 음성 존재, 즉 《무서운 아이들》에서 콕토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에서 기트리는 별 특징 없이 말하거나 영화관이라는 점을 무시하는 체하는 대신에 말투 · 발음 · 음색을 통해 공공연히 우리와의 거리를 염두에 둔다. 이 음성 존재는 '나'라고 말할 수 있지만, 자신을 이러한 나로 생각하는 일이 우리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멜빌이 감독한 《무서운 아이들》에서 콕토의 목소리는 내레이터의 관례적인 것으로서보다 강연을 하는 작가의 목소리로서 울린다. 기트리의 목소리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목소리는 낭송하는 방식이 전제하는 관객을 매개로 하여 우리에게 투사되어 자기 자신에게 도취된 듯 말한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을 '내면의 목소리' 혹은 누구나의 목소리와 동류시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상 자아의 목소리에 적절한 신중함과 결합된 음색과 억양의 어느 정도의 중립성은 보통으로 기대되는 것이다. 각각의 관객들이 자아의 목소리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으려면, 자아의 목소리는 낭독에 대해서 양심의 심판 속의 자백하는 씌어진 대본일 그것에 가까이 가야 한다.
만일 어떤 보이스 오버가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된 듯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듣는다면, 어떤 육체, 즉 사람의 이미지는 동일시를 방해할 것이다. 그 보이스 오버는 우리를 영상 안으로 받아들여 거기에 기대게 하는 대신에 그것과 우리 사이의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한다. 바로 이 점에서 콕토와 기트리의 의사(擬似) 자아의 목소리들이 영화에서 색다르고 매혹적인 효과를 낸다. 이것들은 내레이션을 전달하는 동시에 그들의 현존과 규모로 그것을 가득 채운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의사 자아의 목소리들이 불가피하지만, 이것들은 어느곳이나 따라가려 하는 조심성 없는 집주인처럼 당신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음성 존재들이 의심하는  날

음성 존재들이 더 이상 모든 것을 알고 보는 목소리로서 움직이지 않고 의심하는 날…… 그날을 추정할 수 있을까? 발성 영화에는 위압적이고 모두 볼 수 있는 명령권자인 음성 존재들 옆에, 완전한 지(知)와 시각이 부여받지 못한 의심하고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음성 존재들이 언제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나탄의 전설》에서 스턴버그의 큰 목소리가 후자 쪽의 목소리인데, '우리는'이라고 말하는 방식과 같이 나오는 영상에 대해 부분적으로 아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 지위 없는 목소리들의 습성은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그렇지만 최근 상당수의 영화들에서 타인이나 주인의 지(知)를 표현하는 등 보이스 오버에 심한 혼란이 일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미 언급한 베르톨루치의 영화 《어리석은 남자의 비극》에서 주인공 프리모의 내면의 목소리는, 대부분이 자칭 분명히 하기 위해(《카이에 뒤 시네마》, 330호 참조)서라지만 실제로는 복잡하게 하기 위해 나중에 감독이 첨가한 것이기 때문에 훨씬 더 타락한 의심의 효과를 낸다. 확실히 이 목소리로 인해 영화는 프리모의 관점에서 만들어졌다(주인공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의 내면의 목소리가 장면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기 때문에)는 사실이 훨씬 더 분명해지지만 '내레이터'가 보지 못하리라고 여겨지는 영상들 위로 끌려다녀서, 스턴버그의 영화에서보다 더 불안하게 하는 혼란 효과를 만들어 낸다. 《아나탄의 전설》에서는 적어도 보이스 오버의 무지가 정말로 모르는 것이든 모르는 체하는 것이든, 무엇에 근거하는지 알 수 있다. 베르톨루치의 영화에는 지의 한계와 지의 대상 자체에 대한 철저한 방해물이 있다.
보지 못하는 목소리, 부분적인 시각이 부여된 목소리는 원초적 장면에서 배제된 제삼자의 것인 듯하다. 배제된 것이 말은 확실히 아니다. 원초적 장면은 오직 그것을 위해 존재하고, 그것에서부터 사건이 급변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모든 것을 보거나 아는 게 아닌, 눈 먼 또는 반 정도 눈이 먼 목소리들이 나오는 모든 문학 작품과 영화의 모태인 《롤 V. 스탱의 환희》의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음성 존재 대부분이 남성(지금이야말로 말할 때다)인 데 반해, 이것은 특히 여성의 목소리가 문제가 된다. 고전 영화에서 음성 존재들이 여성인 경우는 매우 드물고 특이하다(맨케비츠의 《세 아내에게 띄우는 편지》에서 아내들의 목소리는 남편과 '다른 여자'에 대해 제삼의 인물이다).
반면에 테렌스 맬릭의 《천국의 나날들》이나 클로드 를루슈의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와 같이 독창적인 영화들에서, 최근의 보이스 오버에 대한 '조작'을 보면 음성 존재의 투시력과 통제력을 흐트러뜨리고 거기에서 역효과를 끌어내는 방식에서 남성의 편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비록 위에서 언급한 영화 중의 한 영화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맡겨지고 있지만).
두 영화 중 《천국의 나날들》에서 보이스 오버 역시 두 남녀에 대한 제삼자, 즉 주인공의 어린 여동생의 보이스 오버로서, 어른들의 성과 폭력에 관한 그녀의 지식에 비해 매우 특이한 숨바꼭질놀이를 한다(맬릭은 이미 자신의 첫 영화 《황무지》에서 보이스 오버에 변모를 꾀하고 통상적인 이야기를 깨며 관객의 시점을 상실하게 하는 데 적합한 색다른 성격을 부여하려고 시도했었다). 를루슈 영화의 보이스 오버는 이야기에 대한 태도에서 이보다 자연스럽게 '꼬였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말이다. 작가이자 감독이 한 명의 배우, 프랜시스 위스테르의 목소리를 빌려 다른 곳에서 영화를 해설하고, 영화 첫머리 자막을 읽고, 심지어는 외국어로 나오는 시퀸스를 동시에 번역(편지 낭독)했으며, 집단수용소 장면에서는 확성기에서 나오는 목소리도 읊었던 것이다! 최소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음성 존재의 역할을 하기 위해 그처럼 하나의 장소, 자리를 빼앗긴 목소리는 매우 드물 것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이 목소리는 를루슈 감독이 취하려는 양편의 입장에 대한 방해물을 징후화하는 듯싶다.
어째서 이러한 내레이션의 파국 또는 변질이 이야기의 다른 요소에서보다 보이스 오버의 위치에서 나타나는가? 그것은 바로 보이스 오버가 이야기의 주체에 호소하고 그 주체, 관점의 지와 욕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베르톨루치와 맬릭 · 를루슈의 영화에서 음성 존재의 출처, 그리고 그것이 구체화하는 심급이나 욕망은 매우 다양한 이유로 인해 어느 정도는 의식적이고 조작이 가능한 방식으로 '상궤를 벗어'났고 교란되었는데, 이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과거보다는 이야기를 서술하는 그 시간의 특징을 훨씬 더 드러낸다. 이 세 감독의 영화 속에는 우지에 페레스의 탁월한 문구처럼 '서술하는 이야기를 감추려는' 얼마간의 교활한 시도가 실제로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불안정한 입장에 처해 있는 영화와 이야기, 작가들의 수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증가한 현재, 영화의 '묘한' 시기에서 기인한다. 라울 루이스 감독과 같이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자신들 쪽으로 끌어와서 그 위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잊지 말자. 해설의 목소리에 대한 '집주인'의 음색을 풍자적으로 모방하고도 두 개의 목소리, 두 개의 지에 대해 하나를 연기하게 하는 방식 속에서 《도난당한 그림에 관한 가설》 같은 영화는 그렇게 밝혀진 교묘한 장치와 음성 존재의 고전적인 위치 위에서 구성되는데, 이것이 관객을 속이는 것은 아니다.22) 음성 존재는 점점 더 계산적이고 복잡한 존재가 된다. 각 시대의 영화는 그 시대에 어울리는 음성 존재를 갖는다.
10) 음성 존재(Acousmêtre): 저자 미셸 시옹이 만들어 낸 신조어로 '아쿠스마티크(acousmatique: 음원은 보이지 않고 단지 들리기만 하는 소리들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음악 용어 사전에서도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쓰는 듯하다. 역자도 부득이 프랑스어를 그대로 사용하겠다)'와 '존재'를 가리키는 프랑스어 'être'의 합성어이다. 발성 영화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를 가리킨다. 이와 비슷한 등장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국 영화연구계에서 '청각적 등장 인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듯하지만, 본서에서는 이를 '음성 존재(音聲存在)'라고 번역하는 게 좋을 듯 싶다. 이 글의 'acousmêtre'는, 다른 소리들이 아닌 목소리로서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를 의미하는 관념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역주]

11) 피에르 셰페르의 《음악적 대상들에 관한 개론》 참조.

12) 《에크리》, p.318.

13) '외화면'이나 '오프'처럼 프랑스에서 종종 사용되는 이 표현들은 너무 모호하고 의미도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필자는 '아쿠스마티크'라는 용어도 취하기로 했다.

14) 《세계 영화의 역사》, Flammarion, p.234.

15) 이 영화에 관해서는 본서의 제 II부 마지막 장, <파멸로의 이끎> 참조.

16) 《시선과 목소리》, p.32.

17) 《악마 마부제 박사》라는 제목으로 배급된 프랑스어판 《마부제 박사의 천 개의 눈》에서.

18) 프리츠 랑에 관한 그의 저술, éd. Seghers, coll. Cinéma d'aujourd'hui.

19) 《게르망트 쪽》(Bibliothèque de la Pléiade, tome 2 de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p.132).

20) 본문은 한국어로 번역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ㅡ 게르망트 쪽 1》(김창석 옮김, 국일미디어, 1998)에서 인용하였다.[역주]

21) 《시선과 목소리》, pp.42-43(부록 참조)

22) 이 영화에 관해서는 파스칼 보니체르의 《비가시 영역》(Ed. Cahiers/Gallimard, p.107 et seq)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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