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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ap

작금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정해주는 것은 결국 지적, 도덕적 '권위'의 문제다. 이 권위가 무너져버리면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이 혼란에 빠져버린다. 사실은 이미 그런 상황이 된 지 오래다. 알아야 하는 걸 모르니까 무식하다고 하면, 즉각 "내가 그걸 알아야 한다는 걸 왜 네가 정해주냐, 그건 네 생각이지, 그 무슨 엘리트주의냐, 민주주의 모르냐 민주주의"라는 식의 반응이 돌아오는 것이다. 권위를 가소롭게 여기는 게 세련되고 매력적인 스타일처럼 통용되는 시대에 저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시대의 민주시민들은 더 이상 진리를 교육받지 않는다. 거꾸로 민주주의로 진리를 참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야 할 권위가 없으니 청량감이 윤리를 대체하고, 참교육이 진리를 밀어낸다. 이제 아무나 참교육을 할 수 있고 누구나 참교육을 당할 수 있다. 적어도 떠벌이는 일에서만큼은 '실질적 민주주의'가 거의 완벽하게 실현된 것 같다. '뼈를 때리고' '팩폭'을 하다가 목마르면 '사이다'를 찾으면 되고, 외로우면 '공감'을, 힘 빠지면 '응원'을 찾으면 된다. 사이다를 퍼마시는 참교육 민주주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참 교육. 포스트-트루스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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